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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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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9월 29일 오전 10시 5분 북한적십자회의 쌀 포대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그해 여름 최악의 집중호우로 발생한 한국의 수재민 9만여 명을 돕기 위해 북한이 보낸 구호물자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곡수출회사'라고 선명하게 찍힌 쌀 포대를 주고받는 장면은 분단국 당사자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 물자 교류의 역사적 현장.
그것은 이례적으로 북측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또한, 북한의 제의에 대한 남한 정부의 수락도 의외였다.
이 묘한 상황은 어떻게 발생하게 된 것일까?
북한의 수재 물자 지원 이후 남북관계는 화해의 물살을 타고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12년 만에 재개됐으며 처음으로 남북 간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이 이뤄지기도 했다.
수재라는 자연의 큰 재앙 앞에서 인도주의의 중요성과 역할을 보여주었던 대남 수재 물자 지원의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본다.
그해 여름 최악의 집중호우로 발생한 한국의 수재민 9만여 명을 돕기 위해 북한이 보낸 구호물자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곡수출회사'라고 선명하게 찍힌 쌀 포대를 주고받는 장면은 분단국 당사자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 물자 교류의 역사적 현장.
그것은 이례적으로 북측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또한, 북한의 제의에 대한 남한 정부의 수락도 의외였다.
이 묘한 상황은 어떻게 발생하게 된 것일까?
북한의 수재 물자 지원 이후 남북관계는 화해의 물살을 타고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12년 만에 재개됐으며 처음으로 남북 간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이 이뤄지기도 했다.
수재라는 자연의 큰 재앙 앞에서 인도주의의 중요성과 역할을 보여주었던 대남 수재 물자 지원의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