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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3> 3원으로 횡성, 마을단위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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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도내 독립 운동사를 살펴보는 기획보도 순서.

오늘은 단돈 '3원'으로 만세운동을 시작한 횡성과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마을 단위로 펼쳐졌던 원주 만세운동을 취재했습니다.
보도에 홍서표 기자입니다.

[리포터]
횡성 만세운동은 천도교인이 주도했습니다.

서울 3.1만세 시위 소식을 접한 천도교인들은 당시 '3원', 지금으로 치면 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을 들고 서울로 향합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40장 등 시위 물품을 구입해 돌아온 뒤에는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시작합니다.

[인터뷰]
"3월초에 소문을 듣고 가서 독립선언서하고 태극기 이런 것들을 서울에서 구입해서 내려와서 횡성 천도교에 속해 있는 교구 주변에 전달해서.."

이렇게 기획된 횡성 만세운동은 3.1 운동 후 한달 뒤인 1919년 4월1일 횡성장날 가장 격렬한 시위로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상인들은 상점을 폐쇄했고, 원주쪽 주민들까지 소식을 듣고 장터로 모여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총격에 현장에서 5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을 입는 아픔도 겪어야 했습니다.

주로 지역의 중심가였던 장터에서 시위가 열렸던 것과 달리 원주 만세운동은 면 단위 마을중심으로 진행됐습니다.

시내권은 시위 움직임을 포착한 일제의 탄압이 너무 거셌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일제의 헌병이나 경찰 당국에서는 원주에서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는 기밀이 포착이 됐고, 그런 기획이 있었으니까 경계가 아주 강화가 됐습니다."

때문에 원주 만세운동은 부론과 소초, 흥업과 귀래, 문막과 지정 등 대부분 면 소재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소규모 마을 특성상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어, 한 마을에서 시위가 일어나면, 친인척을 통해 옆 마을로 전파돼 도미노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또 일제의 탄압을 피해 야간에 산에 올라 불을 피우는 봉화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stand-up▶
"100년이 지난 지금 처절하게 외쳤던 당시의 함성은 들리지 않지만 자주독립을 염원했던 정신만큼은 기념비와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G1뉴스 홍서표입니다.
홍서표 기자 hsp@g1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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