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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0부 휴전선 60km 북상의 주역 '김영옥 대령'

    방송일 201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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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에서 휴전선을 60km나 북상시켰던 김영옥 장군을 아는가? 한국계 미군 김영옥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최전방 부대에 자원입대했다. 당시 김영옥은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서 구만산 전투를 시작으로 탑골 전투, 금병산 전투, 수안산 전투 등을 이끌었다. 그가 이끌던 1대대는 연일 승리를 하며 ‘무적의 부대’로 떠올랐다. 그 결과 김영옥은 남으로 내려앉은 38선 중부전선을 60km나 북상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이후 2005년, 김영옥 장군은 이 업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는다. 김영옥은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전선의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의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훌륭한 기지와 인성을 두루 갖추었던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DMZ스토리 210부 휴전선 60km 북상의 주역 ‘김영옥 대령’] 전쟁영웅이라 불리는 김영옥, 한국전쟁에 참전해 ‘휴전선 60km 북상’이라는 공을 세웠던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 제209부 통일을 기다리는 초미니선거구

    방송일 201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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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통선 최북단에 위치한 철원군 근북면 ‘유곡리 마을’은 2006년 중선거구제가 실시되기 이전까지 유권자 146명의 ‘전국 최소 선거구’로 유명세를 탔다. 면(面)도 아닌 리(理)에서 군의원 1명을 선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곡리가 최소선거구로 탄생한 배경에는 전쟁의 상흔이 자리 잡고 있다. 근북면은 원래 38선 이북의 김화군 소속으로 한국전쟁 이후 근북면 9개 마을 중 유곡리만이 유일하게 남쪽에 남게 됐다. 그런데 근북면을 행정구역으로 남겨둔 이유는 통일 이후 이북과 선거구를 통합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60세대의 작은 마을에서 세 명의 후보자가 나오다보니 더욱 치열했던 1991년 첫 지방의회 선거. 단 7표 차이로 초대 군의원이 선발되는데.. 통일의 그날을 위해 근북면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던 유곡리마을의 선거. 유곡리 마을주민들에게 당시 선거를 통해 통일을 기다리는 마음과 민통선마을에 대한 바람 등을 들어보자. [DMZ스토리 209부 통일을 기다리는 초미니선거구] 민통선마을의 초미니 선거구였던 유곡리마을, 그곳이 초미니 선거구로 존재했던 이유를 알아보고 당시 주민들의 바람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 제208부 양양성당 38순례길

    방송일 201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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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선에서 가장 가까운 성당, 춘천교구 ‘양양성당’에는 숨겨진 역사가 있다. 1939년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 양양성당의 주임 신부였던 ‘이광재 디모테오(세례명) 신부’의 이야기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될 무렵, 북쪽의 공산 치하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아 천주교 신자들은 자유를 향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광재 신부는 북쪽에서 남하하는 이들을 도왔다. 그리고 이 신부는 1950년 6월 북쪽의 신자들을 인도하다 인민군에게 체포돼, 원산교도소의 방공호에서 처형되고 만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를 ‘사제 성구’로 삼았던 그는 41세의 짧은 생애 동안 희생을 서슴지 않았다. 양양성당은 그런 이광재 신부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38순례길’을 만들었다. 2001년 4월부터 남쪽에서 새로운 터전을 일궈온 신자들과 자손들은 매년 순례 행사에 참여해 이광재 신부를 애도하고 있다. [DMZ스토리 208부 양양성당 38순례길] 춘천교구 양양성당 ‘38순례길’ 속에 숨겨진 역사를 살펴보자.

  • 제207부 한국戰, 여성첩보원들

    방송일 201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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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당시 다양한 모습으로 위장한 채 적진 한복판에 뛰어든 젊은 여성들이 있었다. 전쟁초기, 한국에서 미군들이 직접 첩보활동을 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CIA는 한국에서 활동할 새로운 첩보원을 양성시켜야만 했다. 처음엔 남성들 위주로 양성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남성들의 첩보활동의 실패율이 높아지자 여성들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혹독한 훈련과 사상 검증을 통과한 여성첩보원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주한 첩보 연락처 ‘KLO(Korea Liaison Office)’는 1950년 말, 정전회담 이후 여성첩보대원들을 투입시켰다. 각 파견대별로 심용해, 박정숙 등 20여 명의 여성대원들이 활동했으며 인천상륙작전을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10대 소녀들이었던 그들은 버선발로 인천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침투한 뒤 정찰활동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들은 북한의 병력, 장비규모, 보급현황, 이동사항, 군의 사기, 지역 민심 등을 파악하여 유엔군 측에 제공했다. 군사편찬연구소 조성훈 박사와 KLO 첩보대원 생존자 심용해, 김상기 선생님은 당시 여성첩보원들의 이야기를 생생히 들려주었다. [DMZ스토리 207부 여성첩보부대 래빗] 은밀했지만 위대했던 한국 최초의 여성첩보부대, 그들의 숨겨진 활약을 살펴보자.

  • 제206부 오성산, 중국이 기억하는 두 개의 전투

    방송일 201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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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6.25전쟁을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부른다. 그 중 ‘상감령전투’는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오성산 남쪽, 저격능선과 삼각고지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952년 당시 미 9사단과 중국 15군단은 42일 동안 이곳에서 접전을 펼쳤다. 그런데 중국은 상감령전투에 참전했던 2만 명 내외의 병력을 6만 명이라고 과장하고 있다. 그밖에 중국이 주장하는 상감령 전역 전사자와 영웅들의 전공도 과장됐다는 다수 연구자들의 평가가 있는데 중국이 이 전투를 대승리로 자평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남정옥 박사는 중국이 상감령전투를 대승전으로 과장 선전하는 이유가 오성산에 있다고 말한다. 전투의 결과 북측이 얻은 오성산, 그곳은 수도권까지 조망 가능한 중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상감령전투를 대승전으로 선전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백전대첩’에 있다. 당시 백접대첩에서 ‘유림 장군’은 뛰어난 전술로 청군을 물리쳤다. 이후 백전대첩은 조선군의 2대 승리 중 하나로 불리며, 중국에게는 치욕의 패배를 안겨주었다. 중국에게 있어, 한국전쟁 참전 이후 김화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어쩌면 3백여 년 전 병자호란 당시의 패배를 설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DMZ스토리 206부 오성산, 중국이 기억하는 두 개의 전투] 김화읍 오성산 근방에서 3백여 년의 시차를 두고 중국이 경험한 두 개의 전투, 그들이 차지하려고 했던 오성산을 재조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