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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1>광부 유가족 가난 '대물림'
[앵커]
최근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입니다.

영화 내용 중에는 주인공이 돈을 벌기 위해 독일에 가서 탄광 일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 영화를 계기로, '파독 광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당시엔 국내에서도 석탄산업이 활황이었는데, 너무나 열악한 작업환경 탓에 광부들의 인명 피해가 컸는데요.

G1뉴스에서는 산업전사였던 광부들과 순직 광부들 유가족의 삶을 재조명해 보는 기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먼저, 탄광에서 순직한 광부의 유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 지, 김영수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터]
1970년 4월 20일.

홍두성 할머니가 남편에게 마지막 도시락을 건넨 날입니다.

평소처럼 도시락을 싸들고 집을 나섰던 남편은 탄광에서 사고를 당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해 홍 할머니 나이는 28살, 남편이 왜 죽었는 지, 어쩌다 사고를 당했는지 생각할 경황도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인터뷰]
"다쳐서 오는 줄 알고 병원 앞에서 기다렸는데, 사체실로 바로 들어가는 거에요. 그런 일을 생각하면 어떻게 다 말을 해요. 앞이 캄캄해가지고.."

다섯 남매을 둔 평범한 20대 주부가 가장의 목숨 값으로 받은 건 단돈 69만 5천172원.

할머니는 이후 선탄장 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지만 가장을 잃은 설움은 끝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우리 둘째 선 봤어요. 그러니까 신원조회가 넘어왔더라 이러는 거예요. 그땐 아버지 없는 게 이렇게 서러운가 싶은 게.."

72살 김남이 할머니는 1980년 탄광에서 일하던 남편을 규폐증으로 먼저 떠나 보내고, 이듬해엔 20살 먹은 아들마저 탄광 사고로 잃었습니다.

보상금으로 작은 식당을 냈지만, 혼자 다섯남매를 키우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인터뷰]
"함백산 꼭대기 살았거든 눈이 이만큼 빠져도 운동화 제대로 못해준게 그게..아들보고 그래요 운동화 좋은거 사 신어라."

산업재해보상이 없던 시절, 순직해도 단 한차례 받는 광업소 보상금이 전부였습니다.

유족들은 가장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잠시, 앞으로 어떻게 살 지가 더 막막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힘든거는 애들 학교 못 보낸 게 힘들었죠. 항상 지금까지도 자식들 못 가르친 게 한이 됐지"

미망인들은 지금도 한달에 수십만원 밖에 안되는 연금과 병든 몸 때문에 고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G1뉴스 김영숩니다.
김영수 기자 yskim@g1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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