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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P여> 강릉 선교장의 '광복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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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올해로 73주년을 맞은 광복절의 감회를 느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은 도내에도 여러 곳이 있습니다.

강릉 선교장도 그 중 한 곳인데요,

광복에 대한 염원과 나눔의 전통을 실천해 온 선교장 가문의 역사와 면면을 전종률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터]
강릉 선교장은 1703년부터 지어진 개인 소유의 99칸 전통 가옥입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당시에는 집 앞까지 물이 차 배 위에 놓인 널판지를 밟고 대문을 드나들었다해서 집 이름이 배다리, 즉 선교장입니다.

영동지역 대부분의 땅을 소유했던 대부호였지만, 낮은 자세로 상생의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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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재산을 나누지 않으면 하늘이 나누게 한다 그랬어요. 하늘이 나누게 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화를 받는다는거죠. 하늘이 너를 멸망시키니까 그 이전에 잘 나눠라."

[리포터]
가난한 이웃과 음식을 나눴고, 항일독립운동에 자금을 보탰습니다.

민족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선교장 한켠에는 도내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진학교를 세웠습니다.

독립운동가인 성재 이시영, 백범 김구선생이 선교장을 자주 찾았고, 몽양 여운형선생은 동진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광복 후 김구선생은 독립운동을 지원한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직접 쓴 휘호를 보내왔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뒤뜰에서 몰래 키우다 광복 직후 바깥 정원에 옮겨 심은 무궁화가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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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동산 사당 앞에 무궁화 두 그루를 몰래 심어 놨었습니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 저희 할아버지께서 그 무궁화를 이 자리에 양쪽에 옮겨 놓으시고."

[리포터]
조선시대 선교장은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구경하기 위해 길을 떠난 시인묵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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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하기 위한 베이스캠프에요, 전초기지에요. 여기서 학식과 등급에 따라 며칠 묵고 간 분들도 계시고, 한두달 묵고 가신 분들도 계시고."

[리포터]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감사의 뜻으로 남긴 글씨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300년을 이어온 선교장의 나눔과 상생 정신은 부자와 사회지도층의 도적적 의무가 강조되는 현대사회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G1뉴스 전종률입니다.
전종률 기자 jrjeon@g1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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