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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1>"사북항쟁, 잊혀진 광부들의 절규"
2022-07-26
박성준 기자 [ yes@g1tv.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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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기 한 달 전.
강원도 정선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광산 노동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광부와 가족, 주민 전체가 노동탄압과 부당한 국가 공권력에 대항했던 이른바 '사북항쟁'인데요.
아직까지 정부의 공식 사과는 물론 생존자에 대한 배상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G1방송과 한국언론진흥재단은 사북항쟁 42주년을 맞아 당시 광부와 지역민들의 피맺힌 절규와 가려졌던 진실을 찾아,
민주화 운동으로 재조명하기 위한 기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첫 순서로 박성준 기자가 당시 상황을 정리했습니다.
[리포터]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석탄가루 자욱한 갱도 끝 막장에서 목숨 걸고 일해도 한 달 월급은 15만 원.
1980년 4월,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들은 사측을 상대로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사흘간 사북 일대를 점거한 광부들의 농성은 사측과의 합의로 일단락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공권력에 의해 처참히 무너지고 짓밟혔습니다.
[인터뷰]
"총을 든 계엄군들이 들어와서 전원 체포한다. 버스 바닥에 엎드리라고 해가지고 그러니까 막 군화발로 등위로 왔다 갔다 그래요."
처음에는 노사 문제였지만, 나중에 주민 항쟁으로 번진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복 경찰관이 노조원들을 사찰하다 발각돼 경찰차로 광부들을 치고 달아났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료와 가족, 주민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또 시위대 진압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자 계엄당국은 합동 수사단을 파견하는 등 더욱 강경해졌습니다.
끔찍한 시간은 그때 부터였습니다.
합수단의 고문과 폭행 등 반인륜적인 악행이 이어졌고, 언론마저 공조해 선량한 광부들을 '폭도'로 내몰았습니다.
그해 5월 광주항쟁이 발생하기 불과 12일 전의 일이었습니다.
[인터뷰]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고 고생했던 사람들이 명예회복을 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죽기 전에 이뤄졌음 좋겠다.."
공권력 투입 끝에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광부와 가족 등 2백여 명이 잡혀가 고문을 당했고, 31명이 구속됐습니다.
◀브릿지▶
"사북 항쟁은 제대로 된 실태 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최근 지역 사회의 노력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사북항쟁에 대해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권고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노동운동의 모태라는 의미를 부여했는데,
하지만 진정한 명예회복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은 건 단 스물 명에 불과하고,
무엇보다 제대로된 조사가 없었습니다.
[인터뷰]
"관련자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생존의 한을 풀지 못한 채 저승에 가서야 뒤늦게 사과와 형식적인 보상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합수단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고문을 피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고발해야했고,
주민들 사이에 불신이 팽배해지면서 지역사회도 철저히 파괴됐습니다.
더구나 평생 범법자라는 낙인이 찍혀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은 아직도 가난을 되물림하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G1 뉴스 박성준입니다.
*본 보도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
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기 한 달 전.
강원도 정선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광산 노동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광부와 가족, 주민 전체가 노동탄압과 부당한 국가 공권력에 대항했던 이른바 '사북항쟁'인데요.
아직까지 정부의 공식 사과는 물론 생존자에 대한 배상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G1방송과 한국언론진흥재단은 사북항쟁 42주년을 맞아 당시 광부와 지역민들의 피맺힌 절규와 가려졌던 진실을 찾아,
민주화 운동으로 재조명하기 위한 기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첫 순서로 박성준 기자가 당시 상황을 정리했습니다.
[리포터]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석탄가루 자욱한 갱도 끝 막장에서 목숨 걸고 일해도 한 달 월급은 15만 원.
1980년 4월,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들은 사측을 상대로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사흘간 사북 일대를 점거한 광부들의 농성은 사측과의 합의로 일단락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공권력에 의해 처참히 무너지고 짓밟혔습니다.
[인터뷰]
"총을 든 계엄군들이 들어와서 전원 체포한다. 버스 바닥에 엎드리라고 해가지고 그러니까 막 군화발로 등위로 왔다 갔다 그래요."
처음에는 노사 문제였지만, 나중에 주민 항쟁으로 번진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복 경찰관이 노조원들을 사찰하다 발각돼 경찰차로 광부들을 치고 달아났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료와 가족, 주민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또 시위대 진압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자 계엄당국은 합동 수사단을 파견하는 등 더욱 강경해졌습니다.
끔찍한 시간은 그때 부터였습니다.
합수단의 고문과 폭행 등 반인륜적인 악행이 이어졌고, 언론마저 공조해 선량한 광부들을 '폭도'로 내몰았습니다.
그해 5월 광주항쟁이 발생하기 불과 12일 전의 일이었습니다.
[인터뷰]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고 고생했던 사람들이 명예회복을 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죽기 전에 이뤄졌음 좋겠다.."
공권력 투입 끝에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광부와 가족 등 2백여 명이 잡혀가 고문을 당했고, 31명이 구속됐습니다.
◀브릿지▶
"사북 항쟁은 제대로 된 실태 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최근 지역 사회의 노력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사북항쟁에 대해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권고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노동운동의 모태라는 의미를 부여했는데,
하지만 진정한 명예회복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은 건 단 스물 명에 불과하고,
무엇보다 제대로된 조사가 없었습니다.
[인터뷰]
"관련자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생존의 한을 풀지 못한 채 저승에 가서야 뒤늦게 사과와 형식적인 보상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합수단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고문을 피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고발해야했고,
주민들 사이에 불신이 팽배해지면서 지역사회도 철저히 파괴됐습니다.
더구나 평생 범법자라는 낙인이 찍혀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은 아직도 가난을 되물림하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G1 뉴스 박성준입니다.
*본 보도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
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박성준 기자 yes@g1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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