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회
2017-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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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간 냉전이 극에 달했던 1960년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한국 정부.
정부는 오직 북한을 이기기 위한 축구단을 창단한다.
바로 육, 해, 공군과 해병대, 그리고 실업팀 선수까지 강제 차출해 만들어진 중앙정보부 (현 국가정보원) 소속의 ‘양지 축구단’
당시 국가대표 23명 중 11명이 ‘양지 축구단’ 소속이었을 만큼 초호화 선수단을 꾸렸다.
“이기라면 이기고, 죽으라면 죽어라” - 김형욱 중앙정보부 부장
북한을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6시부터 저물 때 까지 이어진 강도 높은 훈련은 축구의 ‘실미도 부대’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대통령 배 전국 축구 대회는 물론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준우승 등
총 26전 18승 2무 6패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둔 양지 축구단.
하지만 안타깝게도 창단 3년 만에 해체하게 된다.
짧은 역사를 남긴 채 해체됐지만, 훗날 한국축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양지 축구단.
양지 축구단의 탄생과 활약 그리고 그들이 한국축구에 남긴 의미를 DMZ스토리에서 재조명해본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한국 정부.
정부는 오직 북한을 이기기 위한 축구단을 창단한다.
바로 육, 해, 공군과 해병대, 그리고 실업팀 선수까지 강제 차출해 만들어진 중앙정보부 (현 국가정보원) 소속의 ‘양지 축구단’
당시 국가대표 23명 중 11명이 ‘양지 축구단’ 소속이었을 만큼 초호화 선수단을 꾸렸다.
“이기라면 이기고, 죽으라면 죽어라” - 김형욱 중앙정보부 부장
북한을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6시부터 저물 때 까지 이어진 강도 높은 훈련은 축구의 ‘실미도 부대’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대통령 배 전국 축구 대회는 물론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준우승 등
총 26전 18승 2무 6패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둔 양지 축구단.
하지만 안타깝게도 창단 3년 만에 해체하게 된다.
짧은 역사를 남긴 채 해체됐지만, 훗날 한국축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양지 축구단.
양지 축구단의 탄생과 활약 그리고 그들이 한국축구에 남긴 의미를 DMZ스토리에서 재조명해본다.